
1. 루저의 세계에서 작은 ‘한 방’을 꿈꾸다: 성장 대신 버티기의 청춘
영화 〈싸움의 기술〉은 흔히 말하는 ‘성장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재민(백윤식이 아닌 임형준)과 병규(백윤식)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루저들이다. 학교·가정·사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이들은 상처와 무력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영화는 바로 이 버티기의 세계를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재민은 학교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집에서는 무능한 어른들의 그림자 아래 짓눌린다. 자신을 지켜줄 것도, 기대할 것도, 미래를 위해 준비할 것도 없다. 병규는 어른이지만, 어른답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삶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정체성을 잃고, ‘싸움’이라는 기술 하나에만 집착하며 살아간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라 시대의 소외자들이 서로에게 발견한 작은 연결고리이다. 재민에게 병규는 ‘싸움’을 통해 억압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사람이고, 병규에게 재민은 잃어버린 젊음과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존재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경험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변화가 ‘성공’이나 ‘승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조금씩 되찾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삶의 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은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거대한 역경을 극복하는 영웅 서사도 없다. 그저 내일을 조금 더 버티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힘, 최소한의 용기를 조금씩 얻어갈 뿐이다. 이러한 미묘한 감정선이 영화에 독특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2. 싸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 욕망·분노·존엄을 배우는 과정
〈싸움의 기술〉이 특별한 이유는 ‘싸움’을 단순한 액션이나 신체적 능력의 문제가 아닌 존엄을 되찾기 위한 태도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병규는 재민에게 주먹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그 기술의 핵심은 결국 ‘세상에 당하고만 살지 말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병규의 가르침은 엉성하고 폭력적이며 때로는 유치하기조차 하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감정적 진실이 있다. 재민은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구조적 폭력—학교 폭력, 무기력한 가정, 실패한 교육 제도—에 의해 내면이 무너진 상태였다. 병규는 재민에게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주도권을 되찾게 한다.
재민이 처음으로 맞서 싸우는 순간, 그는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기 인생의 주체로 한 발 내딛는다. 그 한 걸음은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라 ‘존엄의 회복’이다. 이 영화가 폭력을 영웅화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영화는 싸움이라는 행위가 인간의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분노를 제어하고 다루는 기술임을 보여준다. 병규는 재민에게 주먹을 날리는 법보다 언제 싸우고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더 강조한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르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교육 관계는 때로 갈등을 일으키고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며 관객을 끌어당긴다. 병규의 엉뚱한 조언과 재민의 서툰 반항은 언뜻 보기엔 가벼운 코미디 같지만, 그 이면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3. 승리보다 남는 감정: 씁쓸함·연민·희망이 교차하는 여운
〈싸움의 기술〉의 클라이맥스는 화려한 결전이나 극적인 반전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싸움은 재민이 스스로 선택한 싸움이며, 병규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그는 누군가의 대리전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주먹을 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끝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가 아니다. 재민이 느끼는 감정은 통쾌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병규 역시 자신이 온전히 이겼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싸움은 언제나 절반의 승리이고 절반의 패배다. 이 지점에서 〈싸움의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인생의 싸움이란 대부분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상처를 덜 입기 위해 버티고,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맞서고,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많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삶의 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감정은 작지만 확실한 희망이다. 재민은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졌고, 병규는 비록 초라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변화시켰다. 두 사람의 인생은 여전히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바닥에 짓눌린 채 살아가지는 않는다.
바로 이 애틋한 성장과 미세한 변화가 관객의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는다. 그들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냉혹하며, 미래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아주 작게나마 자신을 지키는 기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는 태도가 생겨난다. 그게 바로 영화가 말하는 ‘싸움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