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일제의 광기 속에서 탄생한 두 ‘괴물’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등장
이준익 감독의 〈박열〉은 1923년 관동대지진과 그 직후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피해자 중심의 서사가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시선을 통해 일제의 민낯을 까발린다.
서사는 박열이 이미 ‘일본의 적’으로 지목받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과 선언, 조직 활동이 오히려 일본 당국의 공포심을 자극해 사건이 증폭되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즉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로서 영화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는 인물이 서 있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영웅 서사’가 아니라 피해를 미화하지 않는 강단 있는 태도에 있다. 박열은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적극적 저항자이며, 후미코는 일본인임에도 조선 차별에 분노하고 식민 체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동등한 혁명 동지로 인정하며, 영화는 이들의 관계를 로맨스가 아닌 ‘사상적 연대’로 묘사한다.
이준익 감독은 역사적 참상—관동대지진 이후의 공포와 혐오 분위기—를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두 사람의 시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천황을 폭살할 것이다”라는 선언을 내세워 스스로를 일본 사회가 두려워해야 할 존재로 규정하는 장면은 도발적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투쟁 방식이 얼마나 체제의 모순과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2. 법정에서 벌어지는 ‘진실 폭로극’ — 언어와 논리로 싸우는 혁명가들
〈박열〉의 중반부는 거의 대부분 법정 드라마의 형태를 띤다. 여기서 영화의 진정한 재미가 나온다. 일제는 조선인 학살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박열을 ‘대역죄인’으로 만들려 한다. 즉, 실제 폭탄 계획이 없어도 ‘있었다’고 조작해 국가 공포 프레임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한다.
그들은 법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을 공개적으로 비웃고, 재판 과정을 체제 풍자의 장으로 바꿔버린다.
● 말 하나가 폭탄보다 강력한 순간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후미코가 일본판사가 “너희는 천황을 왜 미워하는가?”라고 질문하자, 망설임 없이 “그는 허상이며, 조선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권력의 중심일 뿐”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말투는 조용하지만 기세는 압도적이다.
박열의 논리는 더욱 노련하다. 그는 재판이 조작임을 알면서도 “내가 정말 천황을 죽이려 했다면 이미 했을 것”이라며 법정을 조롱한다. 일본 검찰은 분노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가 일본의 ‘성역’인 천황제를 뒤흔드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 후미코의 사상과 ‘자기 존재 선언’
후미코는 일본인임에도 스스로를 ‘천황의 노예가 아님’을 강조하며 모든 권위적 명령을 거부한다. 그녀의 과거—가난, 학대, 일본 사회에서의 비루한 위치—는 조선인 박열을 이해하고 그와 함께 싸울 수 있었던 이유로 제시된다.
법정에서 후미코가 박열과 함께 사형을 요구하는 장면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스스로 규정하겠다는 마지막 선언이며 영화의 정서적 중심선이 된다.
결국 재판 자체가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기보다, 박열과 후미코가 일본의 억압 체제를 풍자하고 흔드는 정치적 쇼가 되어버린다. 이는 일제가 의도한 ‘조선인 희생양 만들기’ 전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3. 자유를 갈망한 두 인간의 비극적 결말 — 저항의 가치는 무엇인가
영화 후반부는 박열과 후미코의 개인적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재판 과정에서 계속해 저항하지만, 일본 관료들은 그들을 ‘유명인’으로 만드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형 대신 무기징역 혹은 감형을 논의하며 사건을 조용히 묻으려 한다.
하지만 후미코는 체제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희생이나 비극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거짓된 자비와 권력 구조를 끝까지 거부한 최후의 저항이다.
● 박열의 고독
후미코가 떠난 후 박열은 깊은 허무에 빠지지만, 동시에 그녀의 죽음이야말로 일본이 두려워하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는 박열을 초월적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고, 단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버틴 인간으로 보여준다.
그의 생존 자체가 체제를 향한 또 하나의 저항이며, 후미코의 죽음은 그 신념의 유산이 된다.
● 영화가 던지는 질문
〈박열〉은 관객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 억압의 시대에 저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 폭력적 체제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적 행동일 수 있는가?
- 진실을 조작하는 권력을 어떤 방식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가?
영화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단순한 선악 구도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적 권력과 그에 맞서는 개인의 사상·존엄·존재 선언의 충돌을 그린다.
그래서 〈박열〉은 역사적 비극을 다루면서도, 무력하거나 피해 중심적이지 않다. 오히려 인간이 신념을 통해 세계를 흔들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보여준다.